박우상 (朴祐相)
AKA: Park Woo-sang, 박규열
박우상 (朴祐相)본명 박규열. 1943년 1월 2일 전남 광주 출생. 조선대 국문학과졸업. 한국 액션영화의 개척자이자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영화감독.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영웅의 일대기와 전쟁물 서적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대학 3학년 재학 중 고향 선배인 임권택 감독을 만나 영화계 진출을 권유받았다. 임권택 감독의 <망부석>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10여 년 동안 약 40여 편의 작품에서 함께 활동하며 감독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익혔으며 특히 당시 임감독의 장기였던 사극과 액션물의 내용과 스타일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1972년 <맹인 대협객>으로 데뷔한 후 태창영화사에서 제작을 맡은 <죽음의 승부>(1975)로 두 번째 메가폰을 잡았다. 당시 태창영화사는 한국영화를 본격적으로 세계시장으로 수출하기 위해 '방화를 세계로‘라는 슬로건을 걸고 해외진출을 모색하면서 처음으로 제작한 작품이 이 영화였다. 거액의 돈을 숨긴 불상을 차지하려는 세 남자가 서로를 속이고 배신하면서 죽음에 이르지만 정작 불상은 이미 용광로에서 녹아버렸다는 내용의 본격적인 권격 영화로 당시 최고의 인기를 모으던 액션스타 권영문, 바비 킴, 안길원이 함께 출연해 주목을 끌었다. 70년대 단순한 액션물의 범람 속에서 싸움에 그치는 액션이 아니라 드라마와 연관되어 펼쳐지면서 스케일이 크고 리얼한 액션영화를 지향했다. 이후 <내 갈 길을 묻지 마>(1976), <대련의 해당화>(1976), <귀문의 왼발잡이>(1977), <대적수>(1977) 등의 액션영화를 연출하며 한국 권격 영화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자리 잡았다. 액션영화에 대한 자신감과 애정이 남달랐던 박우상은 계속해서 무술과 액션이 돋보이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한국 영화의 해외수출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박우상의 액션영화 스타일은 홍콩과 동남아시아 등지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고 그를 모방한 많은 아류작들이 등장하기도 하는 등 그가 미친 영향은 상당했다. 1970년대 군사 정권이 점차 강화되며 영화에 대한 검열과 탄압이 심해지자 한국 영화계는 깊은 침체기를 맞이하게 되면서 많은 영화인들이 수난을 받았다. 그 역시 1976년 <대련의 해당화>와 <내 갈 길을 묻지 마>가 상영 불가 판정을 받고 감독은 구치소에 수감되는 등의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이에 충격에 휩싸인 박우상은 결국 1977년 이민을 결심하고 미국으로 건너간다. 실제 태권도 5단의 유단자이며 외국사범의 자격까지 갖추고 있었던 그는 그곳에서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늘 보다 화려하고 진지한 액션영화 감독의 꿈을 잃지 않았다. 결국 <돌아온 용쟁호투>(1980)를 시작으로 탁월한 태권도 실력을 인정받아 <킬 더 드래곤>(1984), <닌자 터프>(1987) 등을 연출, 한국영화 감독 중 할리우드 진출 1호의 영광을 얻으며 액션영화 감독으로 성공적인 자리매김을 이룩해낸다. <닌자 터프>의 경우 콜럼비아에 의해 미국 1,650여개 극장에 배급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97년 는 LA를 배경으로 중국계 갱 조직과 이에 맞서는 한국계 갱 조직의 갈등과 대립을 통해 이민 세대들의 힘겨운 삶을 그린 영화. 이민 3세대 착실한 청년 태웅(신현준)을 둘러싼 한국계, 중국계의 범죄조직의 갈등, 그리고, 그 속에서 싹튼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다뤘다. 미라맥스가 배급을 맡아 미국 1천 5백여개의 극장에서 개봉했다. 최근작 <형>(2003)은 무등산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던 직원들을 망치로 때려 목숨을 잃게 한 충격적인 실제 사건의 주인공 박흥숙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대중적 소재와 남성적이면서 세련된 액션, 영화적 재미의 추구 등은 그가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영화세계이다. - KMDB(http://kmdb.or.kr)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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