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52년 5월 21일 중국 광둥성 출생. 홍콩으로 이주하여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녔고, 1970년대에 영국으로 유학하여 해외에서 아시아 시사 문제를 다루는 기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홍콩으로 돌아와 창업했으며, 젊은 시절에는 홍콩의 좌파 사회운동에 참여해 '혁명 마르크스주의자 동맹', '매일전신'(每日戰訊), '신청학사'(新青學社 / 지역주민·노동자 서비스 센터의 전신) 등의 조직에 가입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오랫동안 지역주민·노동자 서비스 센터(街坊工友服務處)가 각급 선거에서 활동할 때 지원 유세에 참여해 왔다. 잠건훈은 문화 사업에 대한 애정이 깊어, 홍콩의 유명 문화 잡지 '호외'(號外)의 편집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시사·정치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왔으며, 식민지 시기의 홍콩에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부터 조국(중국 대륙)의 건설에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어 왔다. 1970년대부터는 보조운동(保釣運動, 댜오위다오 열도를 되찾기 위해 전개한 영토 보호 및 반환 운동) 등 각종 애국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홍콩의 기인(奇女子)으로 불린 적나(狄娜) 등 공익 활동가들과 함께 중국 대륙, 홍콩, 대만의 언론에 장문의 공동 성명, 사설, 시평을 여러 차례 발표했다. 그는 사회적 불공정을 몸소 개선하려는 실천을 중시하며, 약자 계층의 복지 증진과 홍콩 및 중국 대륙의 안정과 번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다. 영화계에 입문한 이후에도 홍콩과 중국 대륙의 정치·제도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견을 제시하고 참여해 왔다. 언론인으로 활동하던 시기에는 독립적으로 다수의 뉴스 다큐멘터리를 촬영했으며, 주요 주제는 중국 사회와 홍콩의 시사 정치였다. 이후 1978년 우연한 기회에 외국 다큐멘터리 감독의 소개로 서극(徐克), 오우삼(吳宇森), 허안화(許鞍華), 진흔건(陳欣健), 감국량(甘國亮) 등 많은 홍콩 영화 뉴웨이브의 감독과 주요 제작자들을 알게 되었고 이로부터 영화계에 참여하여 영화 창작, 기획, 투자, 배급 등 다양한 업무를 담당했다. 영화 배우로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오복성'(五福星) 시리즈, '신용쌍향포'(神勇雙響炮) 시리즈, '성항기병'(省港旗兵) 시리즈, '호문야연'(豪門夜宴) 등 다수의 흥행작에 출연했다. 독특한 외모와 부스스하고 곱슬거리며 탈모가 있는 헤어스타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영화 연기 외에도 텔레비전 무대에서 활약하며, 치밀한 논리와 뛰어난 언변, 개성 강한 이미지로 홍콩 최고의 진행자로 자리매김했다. TVB(無綫電視)의 '환락금소'(歡樂今宵), '향항소저'(香港小姐), '환락만동화'(歡樂滿東華), ATV(亞洲電視)의 '매주일사'(每週一謝), '아주소저'(亞洲小姐), '비취전시대'(肥趣電視台) 등 여러 예능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홍콩영화금상장 시상식의 사회자를 여러 차례 맡았다. 예능 외에도 시사·정론 프로그램의 진행자 및 패널로 활동하며, 직설적이고 대담한 발언과 독특한 사회적 시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1980년대 말에는 자신의 공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홍콩 영화계를 조직·동원해 중국 대륙의 정치적 사건과 자연재해에 대한 발언 및 모금 활동을 주도했다. 그는 희극적 이미지와 사회운동가의 면모를 동시에 인정받은, 홍콩 연예·문화계에서 드문 인물로 평가된다. 2000년에는 TV로 복귀해 TVB의 '대국굴기'(大國崛起), 홍콩 유선방송의 시사 평론 프로그램, RTHK(香港電台)의 '두조신문'(頭條新聞) 등에서 진행자 및 패널로 활동했다. 1984년에는 홍금보(洪金寶)와 함께 ‘덕보영화사'(德寶電影公司)를 설립했고, 이듬해 쇼브라더스 산하 극장 체인을 인수했다. '황가사저'(皇家師姐) 시리즈, '부귀핍인'(富貴逼人) 시리즈, '추천적동화'(秋天的童話) 등 다수의 인기작을 제작했으며, 중·저예산의 실험적 영화 제작을 장려해 '전로정전'(癲佬正傳), '최애'(最愛), '등대여명'(等待黎明), '청부도적설화'(聽不到的說話), '신기량여협'(神奇兩女俠), '최후승리'(最後勝利) 등 예술성과 문제의식을 지닌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 과정에서 장완정(張婉婷), 나계예(羅啟銳), 감국량(甘國亮), 이동승(爾冬陞), 승기연(冼杞然), 장국명(章國明), 관금붕(關錦鵬) 등 혁신적인 감독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1987년에는 경영 방침을 둘러싼 의견 차이로 덕보영화사를 떠났고, 그 자리는 승기연이 이어받았다. 덕보영화사 외에도 1985년 진관중과 함께 ‘편도제작사'(編導製作社)를 설립해 '보확영웅'(補鑊英雄), '인민영웅'(人民英雄), '살수호접몽'(殺手蝴蝶夢), '팔냥금'(八兩金), '고갑천하'(褲甲天下) 등 비주류 성향의 작품들을 제작했다. '팔냥금' 이후 영화 제작에서 물러났으며, 제작사는 1990년 대만 감독 진곤후(陳坤厚)의 '춘추다실'(春秋茶室)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홍콩을 떠나 캐나다로 이민했으며, 이후 대만으로 돌아가 케이블 TV 채널을 운영했다. 1993년에는 홍콩 연예계의 결집을 주도해 ‘홍콩연예인협회’를 설립했으며, 이후 부회장 등의 직을 맡아 왔다. 또한 홍콩 영화 진흥 정책 수립에 참여하고, 홍콩영화발전국 자문위원, 홍콩영화금상장 준비위원으로 활동하며 홍콩 및 중국 영화 산업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2004년에는 중국 대륙으로 돌아가 대지영화사(大地電影公司)를 설립하고, 주로 내륙 영화관 체인 개설과 홍콩 및 내륙 영화에 투자 및 배급하는 데 주력했다. 2009년에는 '세월신투'(歲月神偷)를 투자·제작하여 베를린 국제영화제 수정곰상을 수상했으며, 홍콩 영화 금상장에서도 다수의 상을 휩쓸었다. 이 영화는 홍콩 로컬 영화 부흥의 상징적 사례로 평가받았다. 현재는 은퇴한 상태이다. 1984년 유천란(劉天蘭)과 결혼, 1988년 이혼. 1991년 사녕(謝寧)과 결혼, 2005년 이혼. 가수 잠녕아(岑寧兒)의 아버지. - 해외 위키피디아 사이트에서 발췌 및 편집 ·Facebook : https://www.facebook.com/john.sham.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