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18년 12월 12일 중국 장쑤성(江蘇省)에서 태어났다. 본래 성은 장(張)이었으나, 어린 시절 외삼촌 집에 입양되어 나(羅)씨로 개명했으며, 한때 '나정'(羅晶)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중일전쟁 기간에는 충칭과 상하이 등지에서 연극과 영화에 출연했다. 전쟁 후 홍콩으로 이주하여 1948년 영화(永華) 영화사에 들어갔고, 주석린(朱石麟) 감독의 '청궁비사'(清宮秘史)에서 원세개(袁世凱) 역을 맡아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영화사가 문을 닫은 뒤에는 당황(唐煌)과 공동 연출한 '장부일기'(丈夫日記, 1953), 당황과 이문(易文) 공동 연출의 '명여인별전'(名女人別傳, 1953), 도광계(屠光啟) 감독의 '매괴매괴아애니'(玫瑰玫瑰我愛你, 1954) 등 여러 작품에 출연했다. 1957년 유양화(劉亮華)와 함께 사유(四維) 영화사를 설립했으며, 창립작 '다정하'(多情河)를 통해 처음으로 독립 감독으로 데뷔했다. 이후 '비취호'(翡翠湖, 1958)와 '금봉황'(金鳳凰, 1958) 등에서 직접 연출과 연기를 겸했다. 특히 비취호는 대담한 노출 장면으로 화제를 모으며 흥행에 성공했고, 이로 인해 나유는 상업 영화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1961년 전무(電懋) 영화사에 합류해 '무어문창천'(無語問蒼天) 등을 연출했으며, 이 시기 다른 영화사 작품에도 출연했다. 대표적으로 이한상(李翰祥) 감독의 쇼브라더스 영화 '초선'(貂蟬, 1958)과 '무칙천'(武則天, 1963) 등이 있다. 1965년 쇼브라더스에 합류하여 첫 연출작 '악어하'(鱷魚河)를 만들었다. 이후 5년 동안 총 17편의 영화를 감독하며, '금보살'(金菩薩), '철관음'(鐵觀音) 등의 스파이 영화와 함께 '독룡담'(毒龍潭), '호담'(虎膽), '오호도룡'(五虎屠龍), '영자신편'(影子神鞭), '빙천협녀'(冰天俠女) 등의 무협 영화를 연출했다. 특히 정패패(鄭佩佩)가 주연한 작품들이 많았다. 당시 쇼브라더스 영화들은 흥행에 성공했으며, 1969년 홍콩에서 100만 홍콩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린 북경어 영화 다섯 편 중 세 편이 나유의 작품이었다. 1970년 말, 나유는 추문회(鄒文懷)를 따라 새롭게 창립된 가화(嘉禾) 영화사에 합류하며 주요 감독이 되었다. 그의 첫 작품 '천룡팔장'(天龍八將)에 이어 '당산대형'(唐山大兄, 1971)과 '정무문'(精武門, 1972)을 연출하며 연속 두 해 동안 홍콩 영화 흥행 기록을 경신했다. 이 과정에서 홍콩으로 돌아와 영화를 찍던 이소룡(李小龍)을 스타로 만들었고, 본격적인 쿵푸 영화 붐을 일으켰다. 이후에도 왕우(王羽) 주연의 '냉면호'(冷面虎), '마로소영웅'(馬路小英雄), '소영웅대뇨당인가'(小英雄大鬧唐人街), '작두장원'(綽頭狀元) 등의 쿵푸 영화를 제작했으며, 모두 100만 홍콩 달러 이상의 흥행 수익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후 '황면노호'(黃面老虎)와 '심마'(心魔)를 연출한 후 가화을 떠나 나유 영화사를 설립했다. 하지만 창립작 '금분신선수'(金粉神仙手)를 포함한 그의 영화들은 흥행에 실패했고, 해외 배급으로 간신히 제작비를 회수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후 그는 당시 무명이던 성룡(成龍)의 예명을 만들어주며 '제2의 이소룡'으로 키우려 했으나, 성룡이 출연한 '신정무문'(新精武門), '소림목인항'(少林木人巷), '검화연우강남'(劍花煙雨江南), '비도권운산'(飛渡捲雲山) 등이 연이어 흥행에 실패했다. 반면, 1978년 성룡이 사원(思遠) 영화사로 외부 출연하여 찍은 사형조수(蛇形刁手)와 취권(醉拳)이 대히트하면서 성룡은 일약 무술 영화 스타로 떠올랐다. 1980년대 이후 나유는 감독 활동을 중단하고 영화 제작자로 활동했으며, 마지막으로 제작한 작품은 일도경성(一刀傾城, 1993)이었다. 그는 1996년 1월 20일 홍콩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이듬해 호금전(胡金銓), 이한상(李翰祥)과 함께 금마장(金馬獎)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1953년 유양화(劉亮華)와 재혼, 1975년 이혼. - 향항전영도연대전(香港電影導演大全)에서 발췌 및 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