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철 (張徹)
AKA: Chang Cheh, 張易揚
장철 (張徹)1924년 1월 17일 중국 항저우(杭州)에서 출생, 본명은 장이양(張易揚)이다. 상하이(上海)에서 교육을 받았다. 중일전쟁 기간 동안 충칭대학교(重慶大學)로 피난하여 학업을 이어갔으며, 졸업 후에는 교육부(教育部) 사회교육 작업대(社會教育工作隊)에서 근무했다. 이후 충칭 문화운동위원회(重慶文化運動委員會)에 들어가 연극 활동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상하이로 돌아가 국태(國泰) 영화사에서 '가면여랑'(假面女郎, 1947)과 '황원염적'(荒園艷蹟, 1949)의 각본을 썼다. 1948년에는 장영(張英)과 함께 대만으로 가서 '아리산풍운'(阿里山風雲)을 감독했으며, 이 영화의 주제곡 '고산청'(高山青)을 작사했다. 이 노래는 이후 수십 년 동안 널리 사랑받는 유행가가 되었다. 중국이 공산화된 이후 장철은 대만에 남았다. 그는 국방부 총정치부에 소속되어 중화실험극단(中華實驗劇團) 단장 및 '영극진선'(影劇陣線) 잡지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1951년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재개하며 '영불분리'(永不分離, 1951), '낭심낭심'(狼心狼心, 1956) 등의 작품을 썼다.
1957년, 배우 이미(李湄) 의 초청을 받아 홍콩에서 영화 '야화'(野火)의 각본 및 연출을 맡았다. 이후 홍콩에 정착하여 본명으로 소설을 쓰고, 필명 ‘하관'(何觀)으로 영화 평론, ‘심사'(沈思)로 수필을 집필했다. 1961년 전만(電懋) 영화사에 각본가로 입사했으며, 1962년에는 소씨(邵氏, Shaw Brothers)로 이적했다. 그리고 1965년 '호협섬수'(虎俠殲仇)를 연출하며 신무협 영화의 초석을 다졌다. 1967년 '독비도'(獨臂刀)를 연출하여 홍콩 영화 사상 최초로 100만 홍콩달러 이상의 흥행 수익을 기록했다. 이를 통해 그는 홍콩 무협 영화의 일인자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대자객'(大刺客), '금연자'(金燕子), '보수'(報仇), '마영정'(馬永貞) 등 수많은 히트작을 연출했다. 장철은 또한 왕우(王羽), 나열(羅烈), 정뢰(鄭雷), 강대위(姜大衛), 적룡(狄龍), 왕종(王鍾), 진관태(陳觀泰), 이수현(李修賢), 부성(傅聲), 척관군(戚冠軍), 양가인(梁家仁), 곽추(郭追), 녹봉(鹿峰), 강생(江生), 나망(羅莽), 손건(孫建), 정천사(程天賜), 용천상(龍天翔), 전소호(錢小豪) 등 많은 무협 영화 배우들을 발굴해냈다. 그의 문하에서 조감독으로 활동했던 오마(午馬), 포학례(鮑學禮), 계치홍(桂治洪), 오우삼(吳宇森) 등은 훗날 유명 감독이 되었으며, 무술 지도를 맡았던 당가(唐佳), 유가량(劉家良) 역시 독립적인 감독으로 성장했다.
1970년, '보수'(報仇) 로 아시아 영화제 최우수 감독상 을 수상했다. 1974년에는 소씨(邵氏)의 지원을 받아 대만에서 장궁(長弓) 영화사를 설립해 영화를 제작했다. 1976년 장궁이 해체된 후 다시 홍콩으로 돌아가 연출을 이어갔다. 1983년 다시 대만으로 건너가 활동했으며, 1986년에는 중국 본토로 돌아가 '대상해 1937'(大上海 1937), '서안살륙'(西安殺戮) 등을 연출했다. 1989년, 그의 제자들이 공동 연출한 영화 '의담군영'(義膽群英, 중국 제목: 龍蛇爭霸)은 그를 기리는 헌정 작품이었다.
1992년, 홍콩 영화감독협회에서 명예대상을 수여받았다. 2002년에는 홍콩 금상장 영화제 평생공로상 을 수상했다. 같은 해 6월 22일 오전 향년 78세 로 별세했다. - 향항전영도연대전(香港電影導演大全)에서 발췌 및 편집
스틸 사진   배역 사진
★ 필모그래피
로그인
닫기
아이디 아이디 저장
비밀번호 로그인
아이디 찾기비밀번호 찾기
회원가입
닫기
아이디 * 아이디를 입력해주세요
비밀번호 *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비밀번호 확인 * 비밀번호를 한번 더 입력해주세요
이메일 * 이메일을 입력해주세요
확인